시나리오가 망작이라도 배우들이 살릴 수 있다
'낙원의 밤'은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작품이다. 강남역 대형 전광판에 얼마나 광고를 많이 하는지, 기대를 잔뜩 할 수밖에 없었다. 개봉 알람을 해 두고, 그날 밤에 혼자서 봤다. '낙원'은 제주도인가? 엄태구가 제주로 도망가는 건가? 밤에 일어나는 일인가? 하는 궁금증을 갖고 봤다. 무려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작품이니 작품성은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 우선 영화의 스토리는 너무 뻔한 누아르를 넘어 식상했다. 가족(누나와 조카)이 살해당한 엄태구가 상대 조직의 보스를 살해하고 제주도로 도망해서 숨는다. 죽였다고 생각한 상대 보스는 죽지 않았고, 마이사(차승원)는 복수를 하기 위해 제주도로 조직을 이끌고 찾아간다. 제주에서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전여빈은 삼촌과 살고 있었는데, 엄태구와 살짝 티키타카를 보여준다. 엄태구가 마이사에게 처단당하자 전여빈은 마이사의 조직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삶을 마무리한다. 스토리를 글로 적어보니, 적는 것이 힘들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엄태구의 열연과 멍하지만 지친 눈빛은 그가 연기하는 태구의 피곤한 삶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전여빈은 빈센조의 매력 푼수 검사님의 모습은 간데없고, 텅 빈 말기 시한부 환자의 눈빛을 잘 보여주었다. 시종일관 시니컬한 모습이 삶에 어떤 미련도 없는 사람이란 걸 보여줬다. 조폭 대장 차승원은 선이 굵은 얼굴과 말투로 분노를 억누르며 보스의 복수를 실행해가는 냉혹하고 무서운 모습을 연기했다. 이 셋의 하드 캐리가 망작 시나리오를 그나마 구출해낸 것 같다.
스핀오프를 기대할게요. 마이사님
중간 보스인 차승원은 태구를 잡기 위해 양 사장과 대담을 한다. 그 장면의 대사들은 마이사의 과거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조직의 중간 보스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 태구와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이 사이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주인공인 태구와 재연은 연인이 아니지만, 서로 조금 의지하고 마음을 터놓는 관계가 될 뻔하다가 그렇게들 생을 마감했다. 이 두 주인공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은 크게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조직의 중간보스가 된 차승원의 스핀오프가 만들어진다면, 그 스토리의 처절함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그러나 스핀오프가 만들어진다면 그 감독님께 바람이 있다. '낙원의 밤'처럼 지나치게 누아르스럽지 않게 그려냈으면 한다. 그래서 박훈정 감독이 아닌 다른 분이 메가폰을 잡으면 더 좋겠다. 차승원이라는 배우는 관객들의 머릿속에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코믹 캐릭터가 묻어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뭔가 실없이 던지는 말들은 유머로 다가오기도 한다. 보스의 복수를 정산하기 위해서 길을 나선 조직의 중간보스가 중간중간 던지는 유머를 차라리 좀 참았다면 마이사에 더 몰입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박훈정 감독이라 '낙원의 밤'이 이랬다
이 영화의 감독, 박훈정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낙원의 밤'이 왜 이런 색채가 강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지난 작품들은 '악마를 보았다', '부당거래', '혈투', '신세계', '대호', 'VIP', '마녀', '낙원의 밤'이다. 어둡고 하드코어 한 작품들이 많다. 사실적으로 장면을 묘사하더라도 잔인할 필요는 없는데 굳이 잔혹하게 연출하는 경향이 있다. 각본을 다루는 능력이 탁월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각본을 탁월한 연출력을 통해서 화면에 옮겨내는 능력도 뛰어나다. 다만, 잔혹하게 각본을 써내고, 그 장면을 '탁월하게' 화면에 옮겨내기 때문에 관객의 호불호가 크게 갈린다. 한 인터뷰에서는 본인은 피를 너무 싫어한다고 했는데, 연출하는 장면들을 보면 이해가 안 된다. 연출하는 장면들을 보면 의도하는 바를 바싹 마른 정도로 담백하게 만들어낸다. 특정 영화 장르에 해당하는 작품을 만들어낸다면 그 장르와 무관한 연출은 거의 철저하게 배제한다. 이런 박훈정 감독이 만들어낸 '낙원의 밤'이었기 때문에 '낙원'인 아름다운 제주의 풍광 묘사가 그렇게 담담하게 건조했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지만, 영화의 주연배우들의 하드 캐리로, 그리고 마이사 스핀오프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좋게 좋게 기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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